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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보고서/지역 방송 평가단

[최을영의 만화비평] 세상은 언제나 명랑할 수만은 없다-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

by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2011. 5. 29.



<세상은 언제나 명랑할 수만은 없다-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

<아기공룡 둘리>를 기억하는 분들 많을 게다. ‘호이’, ‘깐따삐야’라는 유행어부터 시작해 ‘라면은 구공탄에~’라는 정체모를 노래까지 유행시켰던 <아기공룡 둘리>는 명랑만화였다. 그들의 일상에는 어두움이 별로 없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문제를 갖고 고민하지만 그 문제는 삶을 송두리째 뒤엎을 만한 것은 아니다. 길동이의 구박도 귀엽고 유치할 뿐이다.

2003년에 발간된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는 둘리가 출연하지만, 다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둘리는 더 이상 명랑 캐릭터가 아니다. 공장 노동자 둘리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초능력을 쓰지 못하고, 도우너는 사기꾼으로 변신했다. 또치는 동물원에 갇혀 다른 타조에게 몸을 팔고, 희동이는 ‘스트리트 파이터’로 변신해 소년원에 들락거린다. 길동이는 도우너에게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아 화병으로 죽었고, 길동이의 아들 철수는 교도소행이 분명한 희동이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계인’ 도우너를 우주과학연구소에 해부용으로 팔아넘긴다. 그것을 애써 말리던 둘리는 길동이 무덤 앞에서 참담한 현실을 원망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이게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의 간단한 줄거리다. 어떤가? 믿겨지는가? 처음 이 만화를 봤을 때 난 이 만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걸핏하면 ‘깐따삐야’와 ‘호이’를 외쳐대던, 또 왠지 미운 사람이 있으면 ‘길동이 같다’고 수군대던 나에게 최규석의 만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만화를 다 보고 나서야 왜 제목이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오마주는 슬픈 게 아니다. 절망적인 오마주였다. 이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둘리의 뒷모습에서 희망은 볼 수 없다.

김수정의 둘리가 19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명랑’이란 틀에다 쏟아 부었다면 최규석은 명랑이란 틀을 거부하고 좀더 직설적으로 2000년대를 그려간다. 그것은 다소간의 과장이 섞였을망정 현실이다. 그래서 감탄하기도 했다. 절망적이면서도, 측은하게 둘리를 쳐다보는 또치의 눈빛이 진정으로 다가와서 감탄했다. 그네들의 한숨이 귓가에 맴돌아서 슬펐고, 이런 만화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하지만 갑자기 다가온 ‘절망’은 버거운 것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감동했으면서도 그 후로 몇 번 펴들지 못했다. 절망이 스며들까봐!

세상은 언제나 명랑할 순 없다. ‘Always 명랑’은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슬픈 날이 있으면 즐거운 날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게 세상을 바삐 돌아가고, 나 역시 그 세상에서 쳇바퀴 돌 듯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기공룡 둘리>를 기억하는 분들 많을 게다. ‘호이’, ‘깐따삐야’라는 유행어부터 시작해 ‘라면은 구공탄에~’라는 정체모를 노래까지 유행시켰던 <아기공룡 둘리>는 명랑만화였다. 그들의 일상에는 어두움이 별로 없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문제를 갖고 고민하지만 그 문제는 삶을 송두리째 뒤엎을 만한 것은 아니다. 길동이의 구박도 귀엽고 유치할 뿐이다.

2003년에 발간된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는 둘리가 출연하지만, 다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둘리는 더 이상 명랑 캐릭터가 아니다. 공장 노동자 둘리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초능력을 쓰지 못하고, 도우너는 사기꾼으로 변신했다. 또치는 동물원에 갇혀 다른 타조에게 몸을 팔고, 희동이는 ‘스트리트 파이터’로 변신해 소년원에 들락거린다. 길동이는 도우너에게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아 화병으로 죽었고, 길동이의 아들 철수는 교도소행이 분명한 희동이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계인’ 도우너를 우주과학연구소에 해부용으로 팔아넘긴다. 그것을 애써 말리던 둘리는 길동이 무덤 앞에서 참담한 현실을 원망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이게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의 간단한 줄거리다. 어떤가? 믿겨지는가? 처음 이 만화를 봤을 때 난 이 만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걸핏하면 ‘깐따삐야’와 ‘호이’를 외쳐대던, 또 왠지 미운 사람이 있으면 ‘길동이 같다’고 수군대던 나에게 최규석의 만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만화를 다 보고 나서야 왜 제목이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오마주는 슬픈 게 아니다. 절망적인 오마주였다. 이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둘리의 뒷모습에서 희망은 볼 수 없다.

김수정의 둘리가 19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명랑’이란 틀에다 쏟아 부었다면 최규석은 명랑이란 틀을 거부하고 좀더 직설적으로 2000년대를 그려간다. 그것은 다소간의 과장이 섞였을망정 현실이다. 그래서 감탄하기도 했다. 절망적이면서도, 측은하게 둘리를 쳐다보는 또치의 눈빛이 진정으로 다가와서 감탄했다. 그네들의 한숨이 귓가에 맴돌아서 슬펐고, 이런 만화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하지만 갑자기 다가온 ‘절망’은 버거운 것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감동했으면서도 그 후로 몇 번 펴들지 못했다. 절망이 스며들까봐!

세상은 언제나 명랑할 순 없다. ‘Always 명랑’은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슬픈 날이 있으면 즐거운 날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게 세상을 바삐 돌아가고, 나 역시 그 세상에서 쳇바퀴 돌 듯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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